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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우제길

제길은 우리화단사에서 특이한 위치에 선 화가들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일제식민지 아래서의 미술교육을 받은 1세대와, 해방 후세대에게 교육받은 제 3세대 사이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앞의 것을 소화 정리하면서도 뒤의 것을 예비하는 전환기적 격변의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제길의 고민은 바로 우리나라 해방 후 근대미술 변혁기 고민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어린시절도 역사의 격류와 함께 시작된다. 그는 1942년 이 나라가 아닌 일본의 교또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당시 그의 가족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4살되던 해인 1946년, 해방이 되자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린시절의 기억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여름밤의 휘저으며 돌아다닌 '반딧불'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훗날 그가 빛의 작가가 된 것은 그의 어린시절의 기억과 무관치 않을 것 같다.

광양은 비록 그의 태자리 묻은 고향은 아니지만, 분명 짙은 향수를 지닌 그의 자람의 고향이었다. 짙푸른 칼라의 광양만의 갯내음, 강둑에 무수히 반짝이던 생명의 새싹들, 그리고 어머님의 고무신 발자국이 뚜렷한 황토길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자랐다. 어쩌면 이국인이 아니면서도 이국적 이질감을 약간은 강요당했을 지도 모를 그 시절부터 그에게는 자기를 쏟아 부을 수 있는 곳, 그 자유의 나래가 절실히 필요했는 지도 모른다.

러한 곳을 곧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광주 서중 2학년 때 방학숙제로 외 할머님의 쪽물을 사용하여 그린 풍경화가 미술 선생님(나점식)의 눈길을 끌었고, 이것이 곧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그는 그림에 빠져 들었갔다. 차라리 그림에 홈뻑 젖어들었다고 해야 겠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우제길은 그림, 그것만을 위하여 자신의 혼불을 재가 되도록 불사르고 있다고 하겠다. 우제길의 예술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인간 우제길이 커다란 비중으로 떠오르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는 꾸밈과 가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소박, 근면하며 정직하다. 그를 보면 나는 늘상 '민초'에 비유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민초'란 잔디와 같이 평범하고, 그러면서도 강한 생명력을 가진 풀이다. 그것은 화사한 꽃도 아니요, 신록을 자랑하는 나무도 아니지만, 결코 소멸하지도 꺽이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어 오면 휘어지기도 하고, 밟으면 짓밟히기도 하지만, 이 풀은 더욱 힘차게 자란다. 민초는 배타적이 아니며, 모든 것을 수용한다. 비바람, 눈비, 하늘에 떠가는 구름, 지나가는 풀벌레, 이들 모든 것은 담대히 수용하며 대지와 운명을 같이 한다. 우제길의 오늘에 이르는 삶은 민초처럼, 밑으로부터, 그러나 당당하고 줄기차게 자기의 길을 걸어왔다.

제길은 새벽빛처럼 부지런한 사람이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은 앞서가는 사람이요, 소망의 사람이며, 기다림의 사람이다.

그는 아침 일찍 스케치를 나갔다가 그대로 학교로 출근하기 때문에 기의 잠바차림일 수 밖에 없어 '우잠바'란 별명까지 갖고 있다. 밤 늦도록 술을 마셔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그는 화실에 있다. 서울에 오는 것도 아침 새벽차로 왔다가 밤차로 내려간다.

그가 개인전만 해도 12회전에 이르고 국내외 단체전에 물경 100여 회 출품하고 있는 비결은, 이 부지런함, 그리고 새벽빛과 함께 일하는 데 있다. 그는 프로정신으로 철저하게 자기와 대결하는 사람이다. 광주 사범학교를 나와 중등교사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경상대학을 졸업하며, 대학원을 마치고, 예술대학에 출강하는 것도 그 같은 그의 끈질긴 집념과 창조적 사명의식에 기인한다.

그를 만나본 사람은 그의 둥글둥글한 성품과 소박한 친근감에 크게 놀랄 것이다.

그는 마치 내면의 불덩이를 아주 부드러운 솜뭉치로 싸놓은 것 같은 사람이다. 그의 그 같은 원만함과 수용적인 부드러움은 어쩌면 그가 말한대로 새벽의 대지 속에서 삭여진 품성 때문인지 모른다. 우제길은 아픔을 이겨낸 사람만이 지니는 초월성과 포용력을 승화된 예술 속에서 터득했다고나 할까?

 
2. 그의 예술, 그의 인생
가 광주사범학교에서 양수아 선생을 만난 것은 그의 화력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페인트를 흘리고 뿌려서 조형해내는 양수아의 작품이 그에게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으나, 깊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작품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인생도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숙되어 갔다. 당시 광주문화인들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광주일보사 뒤 오센집은 그의 예술의 고향이기도 했다. 도깨비 대학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던 이 주점에는 오지호, 양수아, 강용운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곳은 도시 한복판에 남아 있는 유일한 민중적 문화공간이었는 지도 모른다. 오센집 거기에는 세발낙지와 탁배기, 까무잡잡한 김치가 언제나 다정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뚱뚱이 오센 마담과 코구멍에 노르께한 물기가 가시지 않았던 오션영감님은 어쩌면 가난한 예술가들의 애환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진정한 문화애호가였는 지도 모른다. 웃고 떠들고 왁자지껄했지만 주종을 이루는 단골 화제는 미술이었고, 토론이 너무 열띠어 끝내는 다툼으로 번지기가 일쑤였다.

제길도 이곳에서 예술과 열망과 한과 고통을 고스란히 삭이며 젊은 시절을 불태웠다.

그가 69년 [에뽀끄] 미술그룹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것은 그의 예술인생의 커다란 변혁의 매듭을 예비한다. 당시에 비구상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그곳에서 [에뽀끄]의 발족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작가회의 가입에 대한 우제길의 말은 그의 작가적 태도와 앞으로의 진로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있는 사물을 그대로 그린다는 것에 대해 회의도 있었고 성격도 맞지 않았어요. 그리고 선생님의 영향도 있었고, 비구상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 창작의 본질적인 매력 같은 것에 끌려 [에뽀끄]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지요."

늘의 경우는 비구상에 대한 수용도도 비교적 높아지고 인식도 달라졌지만, 당대로서의 이 길의 선택은 사뭇 모험적인 것이기까지 했다. 작품발표의 기회를 갖기 조차 어려웠고, 작품이 팔린다는 것은 더욱이 상상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우제길은 언제나 좁은길, 바른길을 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민초처럼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는 데 자신의 온갖 정성과 창조력을 극대화한다. 그가 줄기차게 공모전이나 해외전에 출품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그의 철학에 기인한다. 자신의 작가적 역량의 공개적 평가에 폐쇄적이지 않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임하는 것이 자기 신장에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수상(76)하고,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한 것도, 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검증과 확인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온 출품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는 작은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초기 교사시절 환경정리를 도맡아 해야했는데 이를 마다하지 않고, 그리고, 자르고, 붙이고, 긋고, 자르는 일들을 수없이 하였다. 필자가 그를 만났던 어느 포장마차 집에서 뜨거운 술국을 마시면서, 당시 교사시절의 힘겨운 작업이 지금의 작품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그와 같은 그의 창조적 도전의식은 그의 작가적 기질의 가장 큰 특질 중의 하나다.

는 어두움을 밝음으로 답답함을 시원한 창조적 상상으로 전환시키는 긍정적 창조력을 가진 작가다. 그 속의 그의 영혼은 순결하고 깨끗하다. 그의 작품에서 빛과 어두움의 대결이 날카로우면서도 기기에 은색의 순결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어두움에 빛을 구속에서 자유와 해방을, 좌절에서 기쁨을 찾아주는 불굴의 작가정신의 소유자이며, 진실한 예술과 삶의 구도자이다.
그는 어두움 속에서 문 틈을 통하여 찬란하게 꼽히듯 들어오는 빛줄기의 모습에서 자신의 삶의 환희를 발견하였다. 그가 쓴 '화가의 고집-신비한 태고의 빛깔을 찾아서'(가나아트 1989. 9 - 10)에서 자신이 빛의 그림을 그리게된 동기처럼 보이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바로 200년 전, 자유와 평화를 갈구했던 프랑스인들에게, 무겁게 열리는 바스티유 감옥의 문 틈으로 새어 나오던 그 영롱스러운 햇살, (그 빛은) 그러한 반가움으로 비춰주었으리라…."

그 빛은 한없는 자유의 율동이며, 해방이며, 진동이다. 사물놀이 패들 중의 상모꾼의 고깔에 매달린 하얗고 긴 띠는 그의 자유에의 갈망, 목마름의 표상이다. 빛에 대비되는 어두움은 우제길의 아픔의 하수처리장이기도 하다. 그 화면의 깊은 데에 그의 '짜증, 한탄, 꿈, 인생을 모두 처집어 넣고…… 참으로 얄미운 것들, 마주 대하기 힘겨웠던 너의 모습까지도 모두 쓸어넣어 버리는' 자기 해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빛은 그들을 가르고, 그것을 살라버리며, 힘차게 솟아오른다.
 
2. 그의 작품 - 자기의 반사
제길의 작품제작 태도 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고민하는 작가이며, 그러기에 그 만큼 실험적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창조적 분출력은 쉬지 않고 발산되기 때문에 때로 그 조형력은 그의 작업을 맥진하듯이 이끌고 가는 것 같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추상화를 하기 시작했다. 60년대에 제작한 작품 [환상]은 이 시기의 그의 경향을 대표적으로 반영하고 있는데, 당대에 소개되기 시작했던 앙포르 멜류적 냄새가 물씬난다. 그의 졸업작품도 베니어 판 위에 물감을 칠하고 거기에 페인트를 흘리고 바르는 작업이었다.

66년 에 이르면서 변화를 시도해 보려고 징후가 두드러진다. [작품66-7Y]는 단순한 선과 평면이 주조를 이루며 색의 배치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앙포르멜적 자유 분방함과 절제된 선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용운이 그의 [수채화전시평]에서 우제길 작품[추B]에 포비즘적 특성과 운동감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의 미술사적 경향을 의식하고 있음도 부인키 어려울 것이다.

60년대는 그 점에서 아직도 모색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시기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베트남 종군 작품]전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작품은 거의가 구상작품으로 루오를 연상시키는 굵은 선과 대담한 대비가 두드러진다. 이들 작품을 통해 그는 추상과 구상에서 공히 역량있는 작가라는 점이 예증되고, 특히 그 선의 유연성과 볼륨감, 운동성이 그의 구상작업의 특징으로 드러난다.

70년대는 그의 작품변혁기이며 무엇인가 안정감을 얻는 시기이기도 하다. 문지르고 태우고 지우며 ([작품70-4]), 긋고, 깍는 시도가 나타난다. 1972년 전남도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도 이 시기에 해당된다. 비구상이 거의 발을 못붙여 오던 전남화단에서, 그의 비구상이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개인적 영예와 더불어 화단사적 전환의 의미를 충분히 예시한 것이다.

[작품 72-5A]에서는 이제 더욱 두드러지게 선과 평면, 기하학적 무늬가 대담하게 등장한다. 또한 철판을 둥그렇게 말아놓은 것 같은 형태를 갖게 함으로서 힘과 리듬, 운동감을 동시에 도입한다. 그러면서도 캔버스에 번지기 작업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색채조각을 뜯어 붙인 듯한 꼴라쥬적(작품 75-2B) 시도를 한다.

76년부터는 드디어 자기가락을 잡은 듯한 징후가 뚜렷하다. 그래서 나는 76년을 우제길 작품변화의 대전환기, 즉 터닝포인트라고 지적하고 싶다. [리듬-3K]에서 보듯이 빛의 조각이 혼재한 듯하면서, 빛을 통하여 리듬과 운동의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는 작업을 한다. 이때부터 빛다운 빛이 우제길의 작품에 자신있게 등장한다. 렌트겐 X-Ray 네가티브 필름처럼 보이기도 하는 평면적인 빛의 줄기를 직선으로, 원으로, 또 오버랩시키면서, 그는 속도감을 상징하는 듯 현대인들의 감각에 깊이 파고들만하다.

76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 [제1회 중앙미술대전]의 특선은 그 같은 그의 독자적 영역과 언어 개척에 대한 인정이라 할 수 있다. 빛의 고을 광주에서 빛의 화가가 태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그는 끈질긴 작가적 진실을 가지고, 그 많은 어두움과 제약을 과감히 불살라 버리고 터널 저편에 한아름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안은 셈이다. 마치 등산객이 산정을 향해 가듯이, 이집트의 드높은 피라미드가 태양을 향하여 한 치라도 더 가까이 가려 하듯이, 그는 끝없는 기지개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의 그림에는 그후 줄곧 어두움과 빛의 굴절, 찢어진 장판의 오버랩이나 심지어 표구점의 목판 판넬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의 핵심적 주인공은 빛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다른 것들은 그 빛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보조자이다. 그래서 그의 빛은 더욱 단순해지고, 화면은 보다 넓어지고자 하며, 그 색감은 한껏 더 많은 대비를 요구한다.

우리가 우제길의 작품을 추상 쪽에 분류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빛줄기라는 구상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기실 구상이면서 비구상적 효과를 주고 있는 것이 우제길 작품의 묘미이다. 이 상극된 두 세계의 조화와 통일 속에서 그는 오묘한 예술의 신비를 추적해 보려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제길은 안일에 정착하는 화가가 아니다. 그는 그의 작업이 안고 있는 고뇌적 과제를 누구보다 익히 알고 있으며, 그래서 서양적 이미지에 대한 한국적 검증을 모색하고 있다. 그가 혁필(革筆)과 민화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 같은 미적 탐구의 일환으로 본다. 우제길은 항상 자기 앞에 놓인 과제를 예술적으로 극복 승화시키는 데 탁월한 역량을 가진 작가라는 것을 이미 증명해왔다. 그 점에서, 우리는 우제길 예술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점쳐 보는 것이다.